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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지나도 잠 못 드는 유해”

경산코발트광산 유해 80여구 세종시 추모의집 임시 안치
26일 오전 9시 천도재 및 전통제례

[경산/김근해기자] 억울한 죽임을 당한 지 69, 유해를 수습한 지 19년이 지나서도 영면하지 못하는 죽음들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 남한지역 최대 민간인학살 현장 가운데 하나인 경산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 유해 80여 구가 오는 26일 오전 세종시 추모집 임시안치소로 떠난다.


이들 80여 유해들은 평산동 민간인학살현장에서 수습된 유해 500여 구 가운데 그동안 유족회가 발굴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의해 충북대박물관 이후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되지 못한 유해들이다. 지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0년 간 발굴 수습된 코발트광산 유해는 총 500여구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수습한 420구만 충북대박물관을 거쳐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되었을 뿐 나머지 유족들이 발굴한 유해 80여구는 현장 컨테이너창고에 길게는 19년 짧게는 15년씩 방치돼 있었다.


행전안전부는 그동안 경산 등 지역유족회가 보관하고 있던 유해 구를 올해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 안치키로 하고 이번에 임시 안치되는 유해는 경산 82, 홍성 20, 대전 20, 부산 17구 등 총 139구로 현재 대전에 조성 중인 추모관이 완성되면 이곳에 영면하게 된다.


이에 앞서 경산코발트유족회는 지난 20105월 진실화해위가 현재 충북대에 보관 중인 유해를 계약기간 만료에 따라 새로운 시설에 안장하는데 따른 유족들의 의견을 구하자, 이미 발굴된 500여구 외에도 현재 갱내에 수천 구가 방치돼 있는 관계로 나머지 미 발굴된 유해를 마저 발굴해 충북대에 보관 중인 유해와 함께 화장해 안장해 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유족들의 요구가 10년만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회장 나정태)는 유해이송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천도재를 시작으로 전통제례의식을 갖춰 먼 길을 떠나는 유해들에 예를 갖출 예정이다. 유족회는 그동안 유해 임시보관소로 쓰이던 컨테이너창고를 정비해 3D모형과 사진을 전시해 순례객들의 이해를 도울 예정이다.


평산동 코발트광산은 매년 국내외 제노사이드 연구자와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2000여명 이상 현장을 방문해 반전 평화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코발트광산유족회는 지난 2016년 국비 500여 억원이 투입되는 행안부의 추모공원 조성공모사업에 주민반대를 이유로 경산시가 응모조차 하지 않자 경산시에 소규모 역사평화공원이라도 조성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유족회는 지난 2013년 조성된 역사체험관광지조성사업 및 2016년 위령탑 건립에 이어 추가로 수평2굴 기재부 소유 임야 800여 평과 수직 1,2굴 편입 개인임야 1000여 평, 위령탑 인접농지 1000평을 추가로 매입해 총 3000평 정도의 소규모 역사평화공원을 조성해 일제의 지하자원수탈에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나아가 한국전쟁 직후 숨진 3500여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과 추모, 기억과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는 데 경산시가 적극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  


경산시는 도비와 시비 79000만원을 투입, 1차로 평산동 폐코발트광산 수직2굴 주변 정비사업에 착수해 갱도 내 안전도검사와 조명 및 갱도 바닥정비, 수평2굴 입구 관람데크 및 안내판, 현장순례단 안내물품 보관창고 설치, 진입로 정비 및 주차공간 조성 이후 국유지 매입 (15000만원)하고 이듬해 시도비 3억원을 들여 위령탑을 건립한 바 있다.

 

경산코발트유족회 010-3802-9512(최승호 이사)

경산시 복지정책과 053-810-5283(김동필 담당)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02-2195-2368(유세현 담당자)

2.참고자료 및 사진첨부

3.평산동 유해발굴 현황

 

평산동 유해발굴현황                   2012. 6 현재

일시

장소

개체수

보관장소

발굴기관

비고

1950.

7-9

코발트광산

3500명 추정

 

 

집단희생자

1960. 6

수직굴

미확인

미확인

유족회

 

 

2001.

3.9-11

수평2

40

현장

MBC/유족회

연세대

법의학팀

2003. 4.14

대원골

20

현장

유족회

유해확인차

2005. 8

대원골

A지점 21

B지점 10

현장

영남대

/유족회

인터불고

골프장 조성

2007. 7-9

수직1

수평1

수평2

미확인

40

120

충북대

진화위

경남대

이상길 교수

2008. 7-11

수평2

 

200

 

충북대

진화위

영남대

박현수 교수

2009. 7-10

수평2

60

충북대

진화위

영남대

박현수 교수

 

 

 

500

충북대 420

현장 80

 

 

 

 

 

 

 

 


<참고자료: <코발트광산 1950-2008>(경산신문, 최승호), 발췌>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유해발굴은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발굴된 유해는 500여구로 충북대 박물관과 현장에 보관되고 있다.

 

1차 발굴은 20013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MBC와 유족회 주관으로 진행됐다. 2차 발굴은 2003414일 유족회 주관으로 대원골에서 실시됐으며, 3차는 2005816일부터 101일까지 유족회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주관으로 대원골에서 진행됐다.  3차 발굴은 당시 대원골에 골프장 조성공사를 하던 인터불고 그룹에서 경비를 지원했다. 4차 발굴은 지난 200778일부터 920일까지 수평 1, 2굴과 수직 1굴에서 진실화해위 주관으로 진행됐다. 진화위는 2008, 2009년 두 차례 더 현장을 발굴했다.

6차례의 발굴 가운데 1, 2, 3차 발굴은 민간 차원에서, 4, 5, 6차는 국가차원에서 진행됐다.

 

) 1차 발굴

 역사 다큐멘트리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프로그램(책임PD 이채훈)을 제작 중이던 MBC20012월 경산유족회에 과연 유골이 있는지 또 다른 갱도를 확인해 보자고 제안했다.  유족회와 시민단체는 수직 1굴과 수평 2굴을 발굴해 보기로 하고 곧바로 대책위를 구성했다.


 먼저 대책위는 수직 1굴 발굴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경산시로부터 산림훼손 허가를 받아 장비의 진출입이 가능하도록 수직 1굴까지 임도를 개설했다. 그러나 수직1굴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데다 흙더미가 무너져 내린 상태라 발굴보다는 안전 확보가 우선이었다. 안전장치를 설치하며 밑으로 파내려가는 작업은 우선 경비가 엄청나게 들었다. 막장전문가로부터 최소 10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견적을 받고 대책위는 수직 1굴 발굴계획을 철회했다.


 대신 수평2굴을 발굴하기로 하고 39일부터 중장비를 동원, 갱도입구를 막고 있는 흙더미를 파헤쳤다.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한 지 30여 분만에 갱도입구가 나타났으나 콘크리트로 막혀 있었다. 중장비로 다음날까지 콘크리트 벽을 때렸으나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난관에 봉착해 있을 때 마침 이곳을 지나던 주민 한 사람이 그 콘크리트 벽은 주민들이 갱도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막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두께만 1미터가 넘는다며 다이너마이트가 아니면 곤란할 것이라고 귀뜸했다.  촬영 일정이 빠듯했던 MBC는 곧바로 폭약전문가를 수소문해 족히 1주일은 걸린다는 과정을 하루 만에 끝내고 11일 오전 콘크리트 벽에 폭약을 장치했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에 막았던 수평2굴이 30여 년 만에 개방되는 순간이었다.


 대책위가 며칠 전부터 미리 물을 빼두었기 때문에 갱도 입구에는 20센티 정도 물이 차 있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이 드러나 진흙 뻘이 나타났다. 유골은 입구를 30여 미터 지나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갱도를 가득 채웠던 물이 빠져나오면서 굴 안쪽에서 떠내려 온 듯 했다. 100미터 정도 더 들어가자 갱도는 두 개로 갈라졌다.

 먼저 왼쪽으로 들어갔다. 50미터 정도 들어가자 무너져 내린 흙더미가 갱도를 막고 있었고 바로 그 앞에 한 무더기의 유골이 쌓여 있었다.  탈육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손 부위와 갈비뼈, 대퇴부 등이었다. 나중에 주민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주민들이 굴 입구를 막을 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골을 가마니에 담아 옮겨놓은 것이라고 했다.


 오른쪽 갱도로 돌려 40여 미터 들어가자 시커먼 진흙에 뒤덮힌 유골들이 사방에 늘려 있었다. 발굴수습작업을 위해 합류한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은 육안으로 봐도 수백 구는 족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책위와 MBC는 뻘에 묻혀 있는 유골들의 감식을 위해 일부분을 수습했다. 수습된 유골은 연세대 법의학팀에 넘겨졌다. 당시 연세대 법의학팀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이었던 김종열 박사였다.

 

수습된 유골 가운데 온전한 뼈는 두개골 2, 아래턱뼈 2, 척추 뼈(목뼈) 3, 척추 뼈(등뼈) 12, 허리 뼈 8, 넙다리 뼈(왼쪽) 12, 발목 뼈 10개 등 총 170여 점이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50, 모두 남자의 유골로 총상흔, 둔기에 의한 외상흔 및 화염흔이 보인다고 감정했다.


 대부분의 넙다리 뼈는 성인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이 가운데 길이가 다소 짧은 1개는 성장기 소년(15-17)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머리뼈와 치아를 제 방법에 따라 연령을 추정한 바 2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을 보이고 있었다.


 부분만 남은 머리 뼈 중의 하나에서 좌측 상부 람다봉합 주위에 지름 약 0.9센티 크기의 원형 손상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작은 물체가 고속으로 머리뼈에 힘이 가해질 때 생기는 형태로 총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한 골편이 떨어진 부분이 안쪽에서 관찰되는 등 전형적인 탄환의 사입구로 판단되며 이 탄환은 머리 뒤쪽에서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사입된 것으로 판단돼 피살자가 앉은 상태에서 총에 맞은 것으로 추정했다.


온전한 머리뼈 중의 하나에서는 우측 머리마루 뼈에 가로, 세로 약 4*1센티, 깊이 약 0.5센티 정도로 찍힌 흔적이 관찰되는데 이는 둔기에 의해 후방에서 뒤통수 쪽으로 힘이 가해져 생긴 형태로 판단되며, 사용된 둔기의 모서리는 비교적 날카롭고 각도가 거의 직각에 가까운 물체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머리 뼈, 아래턱 뼈, 골반 뼈, 위턱 뼈, 긴 뼈 등에서 일부 검은색의 화염흔이 관찰되는 바 이는 인화성 물질의 발화에 의하여 그을린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감식팀은 1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남자의 유골로서 총상흔, 둔기에 의한 외상흔 및 화염흔을 보이고 있다고 최종 감정해 희생자들이 총기와 인화성 물질, 흉기 등에 의해 집단적으로 학살 당했다는 유족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감정에는 김종렬 교수와 건국대 의대 해부학교실 고기석 교수, 고려대 의대 법의학교실 한길로 부교수, 연세대 치대 구강생물학교실 김희진 조교수, 연세대 의대 법의학과 신경진 전임강사 등이 참여했다.


이 수평 2굴에 대한 유골발굴 과정과 유골 감정 결과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방영돼 전국적인 아니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뒤이어 국제진상조사단의 발굴이 시작됐고 코리아국제전법재판으로 이어졌다.

 

 나) 2차 발굴

  2차 발굴은 수평2굴에서 직선거리로 300여 미터 서쪽으로 떨어진 대원골에서 실시됐다. 1차 발굴 때와는 달리 전문가의 참여 없이 순수한 유족회 자체 발굴이었다. 발굴이라기보다는 갱도 이외 지역에서도 민간인학살이 자행됐다는 유족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유족회는 대원골 남쪽 사면의 작은 계곡을 발굴지점으로 정해 작업을 진행한 결과 불과 몇 시간 만에 뼈 조각 25점과 유품 등을 발굴 수습했다. 발굴된 유해는 머리뼈와 치아, 척추 조각 등이었으며 천조각 등 유품도 일부 발굴됐다. 유해들은 대체로 3-4센티 크기로 부서진 상태여서 발굴지점의 토심이 얕은데도 50여 년이 지나면서 크게 훼손된 것으로 추정됐다.

 

 2차 발굴지점은 2002년 경산시의회 청원심사특별위원회(위원장 정교철)의 평산동 현장 진상조사 과정에서 주민 김무술 씨가 학살현장으로 지목한 곳이었다. 2차 발굴 후 유족회와 경산시의회 특위는 청와대와 민주당, 한나라당을 차례로 방문, 유해 발굴과 수습을 촉구했다. 방문단은 정대철 민주당 대표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유해 발굴과 수습이 시급하다며 협조를 요청했고, 한나라당에는 탄원서를 접수했다. 이어 청와대를 방문, 장준영 시민사회1비서관과 김학기 정무지방자치행정관을 면담하고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에 앞서 유해발굴과 수습, 현장조사 등이 시급하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 3차 발굴

 세 번째 발굴은 2005816일부터 119일까지 대원골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 발굴은 대원골 학살현장이 골프장 조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유족회와 지역 시민단체들이 정부와 청와대, 국회 등지에 시급히 발굴 수습을 촉구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업주인 인터불고 측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사전발굴 형식이었다. 3차 발굴은 우선 유족과 목격자들에 의해 학살현장으로 지목된 4개 지점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A지점은 지난 2003년도 2차 발굴 당시에 유골을 확인한 지점으로 수평1굴에서 직선거리로 약 300미터 떨어진 작은 계곡이다. 발굴팀이 150-180센티의 토사를 걷어내자 아카시아나무 뿌리에 엉킨 유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해가 노출된 지역은 가로 480센티, 세로 380센티 크기로 독립개체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발굴된 유해는 아래턱 3, 위팔 뼈 5, 앞팔 뼈 5, 허벅지 뼈 11, 발목 뼈 1개 등이었으며 함께 발굴된 무기류는 칼빈소총 탄두 24, 탄피 57, 불발탄 6개였다. M1 소총 탄피 6, 기타 M1탄 클립 1개가 발굴됐다. 유품으로는 신발 23, 단추 27, 기타 지퍼손잡이 1, 가죽고리와 가죽 1, 바클 1, 붉은 계통 천 등이 나왔다.


A지점에서 발굴된 유골을 1차 감식(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선주 교수)한 결과 최소 개체수는 7, 나이는 아래턱을 기준으로 1번은 26-30, 2번은 20-24, 3번은 26-30세로 추정했다. 허벅지 뼈로 추정한 키는 1161센티, 2번은 165센티였다. 2차 감식(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정상수 교수)에서는 위팔 뼈 우 1, 7, 허벅지 뼈 우 13, 12, 정강이 뼈 우 14, 13개 등이 발굴돼 최소 개체수는 14명으로 추정했다.


1,2차 감식을 통해 A지점에서 발굴된 유해의 최소 개체수는 21명이나 유해의 대부분이 물줄기의 반대편에 위치한 아카시 나무뿌리 근처에서 발견돼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인원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발굴된 칼빈과 M1소총의 탄피와 탄두가 모두 93개로 최소한 21명보다는 많은 인원이 학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살해방법은 근접사격에 의한 총상일 가능성이 높고, 발굴지 위에 상당히 큰 돌이 겹겹이 쌓여 있어 살해한 후 돌을 이용해 가매장한에 추정했다.

 

B지점은 A지점보다 동북쪽으로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의 양이 A 지점보다 많은 관계자로 목격자의 증언보다 조금 아래쪽에 유골이 발굴됐다. 유해 대부분이 물줄기에 쓸려 내려온 듯 물줄기 방향으로 위에서 아래로 드문드문 발견됐다.

 

B 지점에서는 토사를 30센티 정도 걷어내자 A 지점과 마찬가지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A 지점보다는 적지만 탄피와 탄두, 등의 무기류와 유품이 발굴됐다. 발굴된 유해는 위턱 3, 아래턱 5, 등뼈 6, 주걱 뼈 좌우 각 5, 손가락뼈 41개 등 유해와  칼빈소총 탄피 2, M1 소총 탄피 1, 45구경 권총 탄두 1개 등 무기류와 신발 10여점이 발굴됐다. 최소 개체수는 최소 10명으로 추정되는 유해는 아래턱으로 미뤄 1번은 35-45, 2번은 20세 미만, 3번은 20-24, 4번은 30-35세로 추정했다. 키는 1번이 169센티, 2번이 165센티, 3번이 161센티로 추정했다.

 

B지점은 물줄기로 미뤄 최소 개체수인 10명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특히 권총 탄두가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학살이 상당한 고위층의 지휘체계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나머지 두 곳인 C지점과 D지점은 유해가 발굴되지 않았다.

 

 초 예정이 없었던 수직 2굴에 대한 발굴은 MBC의 제안으로 진행됐다. 동굴탐사 전문가인 석동일 씨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수직 2굴에 대한 발굴 결과 코발트광산이 이제까지 알려져 온 것과는 달리 거대한 자연동굴이라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됐고, 수평굴과 마찬가지로 수직굴에서도 총격에 의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직 2굴은 이후 20083월 광산전문가가 코발트 채굴로 인해 함몰된 것이라는 주장이 새로이 제기돼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상태다.

 

수직 2굴은 수직 1굴에서 남쪽으로 20미터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굴과는 달리 입구 자체가 자연동굴 형식으로 돼 있고 5미터 정도 내려가면 곧바로 깊이 21.5미터 정도 낭떠러지가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낭떠러지 바로 앞쪽에서 대퇴부 등 유해 13점과 탄피 1점이 발굴됐다. 감식한 결과 위팔뼈 2, 허벅지 뼈 좌우 각 1, 정강이 뼈 우 2, 3개 등 유해와 M1 탄피 1개가 발굴됐다. 최소 개체수는 3, 키는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1번이 168센티로 추정됐다. 발굴팀은 수직 2굴에서도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낭떠러지 최하부를 조사해 보면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3차 발굴은 민간인학살의 가장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유족들의 기획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는 일이었다. 특히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이 광산 내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광산 외부에서도 광범히 하게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물적 근거들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 4차 발굴

네 번째 발굴부터는 사건발생 57년 만에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20071월 서울대 국토지리연구소에 의뢰해 실측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6월에는  코발트광산 수직 수평갱도에 대한 사전조사를 실시, 드디어 78일 역사적인 개토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발굴에 나섰다. 2007 유해발굴단(단장 충북대 박선주 교수)과 경남대박물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920일 현장설명회까지 70여 일간 수직 1굴과 수평 1, 2굴에서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다.

 

발굴작업은 수직 1굴에서 주로 진행됐다. 수직 1굴은 가로 세로 2*4미터 크기의 시멘트로 된 입구에서 지하 10미터 지점부터는 흙으로 채워져 있다. 발굴작업은 이 시멘트 구조물을 매몰되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굴 내부에 채워진 흙을 걷어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것은 유족과 목격자들이 수직 1굴에서 민간인 수 천명을 학살, 매장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으로 굴 내부에 채워진 흙을 걷어내 유해를 발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발굴작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발굴기간이 장마기인데다 발굴단원들이 대부분 대학생들로 구성돼 기대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갱도 내부에 물이 차는 데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낙석으로 인해 발굴팀이 위험에 노출돼 약 2개월 여 작업기간 동안 겨우 1.5미터 정도 파 내려가는데 그쳤다.  작업 도중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초 생각보다 흙이 두텁게 차 있어 유해를 발굴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대신 발굴팀은 수평 1, 2굴에서 지난 2차 발굴에서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해들을 발굴 수습하는 것으로 발굴의 무게 중심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발굴 결과 수평 1굴에서 40, 수평 2굴에서 120구를 수습했다. 유해와 함께 직접적인 학살의 증거로 보이는 탄두 5점과 M1 탄피 18, 칼빈 22점을 비롯해 피해자의 손목을 묶은 것으로 보이는 삐삐선 등을 발굴했다. 또 학살된 민간인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과 단추, 천 조각, 칫솔, 허리띠, 버클, 박봉우(朴奉羽)라는 이름이 또렷한 도장도 발굴됐다. 단추의 경우  블라우스용으로 쓰이는 단추도 발굴돼 여성도 학살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2007 유해발굴단의 발굴 결과 학살에 시용된 칼빈과 M1 탄피, 삐삐선 그리고 학살된 민간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장과 허리띠, 신발, 단추 등 유품이 대량으로 발굴됐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별도로 진행된 인문사회팀의 구술증언 조사에서도 증언자들은 한결 같이 군경에 의한 학살이라는 사실을 증언했다.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사건과 관련해서는 총 10명을 구술 조사했다. 이 가운데 유족이 7, 목격자가 2, 기타 1명이 구술조사에 응했다. 가해자로 추정되는 경찰출신이 1명 있었으나 증언을 완강히 거부해 조사하지 못했다. 목격자 조사에도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2000년 초 자유롭게 목격담을 이야기했던 코발트광산 주변 주민들이 7년이 지난 올해 2007 유해발굴단 인문사회팀 조사에는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동안 직접 현장을 목격한 1세대들이 유명을 달리한 탓도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당시 상황을 계속 이야기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족에 대한 구술조사는 일반적인 인적사항을 토대로 연보를 작성하고, 사건과 관련한 기억을 되살리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7명의 유족은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이 가운데 2명은 형무소에 수감 중 군경에 인계돼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보도연맹 가입 동기는 10.1사건에 참여한 전력으로 가입한 사람이 3, 부역혐의가 2, 2명은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1사건과 직 간접적으로 연루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7 유해발굴단 인문사회팀의 일원으로 참여해 경산 코발트광산사건 관련 유족과 목격자, 기타 관련자에 대한 구술증언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57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족들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4.19로 인해 촉발된 1차 진상규명운동이 다음 해 곧바로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된 이후 40년 간 이 땅에서 보도연맹원은 곧 빨갱이고,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은 이적행위로 간주돼 유족들의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됐다는 사실이었다. 입이 있어도 말 할 수 없었던 공포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이 조사과정에서 만난 유족들의 피해의식도 그만큼 뿌리 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발생한 민간인학살 현장에 대한 57년 만에 국가 차원의 발굴이 이루어진 것은 지난 60년부터 47년 간 진행된 진상규명운동 역사에 있어 일대 전기를 마련한 해였다.

 

2007 유해발굴은 시민단체와 언론, 유족들의 적극적인진상규명 활동에 기인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그간의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 되었다. 이전까지 정부는 이들의 8년에 걸친  줄기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구에 증거가 없다며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었다. 그러나 유해와 함께 발굴된 M1과 칼빈소총 탄피, 삐삐선, 민간인 도장, 단추 등 유류품은 그간 정부가 취해온 태도를 일거에 뒤집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향후 한국전쟁을 전후로 저질러진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진상규명 작업에 명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2007 유해발굴은 중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사 지우기라고 폄훼했던 보수층에게도 더 이상 진상규명작업을 방해할 명분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2007 발굴은 유족들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족들은 부모형제가 국가기관에 의해 처참하게 희생됐지만 이때까지 57년 간 국가로부터 그 어떤 사죄나 배상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제대로 된 위로조차 받을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내 남편, 내 부모, 내 형제가 맞는데 그들을 자기 부모형제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정부가 그동안 학살의 주체가 군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 발굴로 학살의 주체가 군경이라는 물증이 드러남으로써 유족들의 명예는 다소나마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 2008 2009년에도 국가차원으로 유해발굴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 소련제 고폭탄으로 추정되는 불발탄이 발견돼 국가차원의 은폐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육군은 탄약지원사령부 제2탄약창 폭발물처리반이 유해 발굴현장에서 수거(경산신문 791200898일자 보도)한 폭발물을 분석한 결과 1900년경 구 소련에서 개발 생산된 76mm 고폭탄으로 보인다며 근거로 신관의 형태 및 러시아문자(Π-영어영역: P)를 들었다. Π는 보통탄 유산탄을 의미하며 6.25 전쟁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현재 북한 사용여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사거리는 최대 12km 정도로 파편 비산거리는 300m, 세열수류탄 6발 규모의 인마살상용이라고 덧붙였다.


육군의 이 같은 감정결과에 대해 영남대 유해발굴단 및 경산유족회 관계자는 6.25 전쟁 당시 영천전투가 치열했다고는 하나 발굴현장에서 20km 이상 떨어져 있어 76mm 적성탄의 유효사거리로 볼 때 전쟁 중 북한군이 발사한 불발탄이라는 보기 어렵다며 경위야 어떻든 간에 갱도에 폭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5차 발굴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현장 발굴에서 2008년도 200여구의 유해가 추가로 발굴돼 내년도에도 계속 발굴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위)는 지난 달 27일 평산동 현장에서 지난해에 이에 올해 실시한 2차 발굴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국가차원의 2차 발굴을 진행해온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책임연구원 박현수 교수)는 수평 1굴과 2굴에서 발굴한 유해 200여구와 76mm 고폭탄, 탄피, 가죽혁대, 고무신, 가죽구두, 단추, 판초우의 조각 등 유품 50여점을 공개했다. 특히 2차 발굴에서 발굴된 76mm 고폭탄은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소련제 인마살상용 폭탄(본지 200898일자 보도)으로 당시 가해자들이 처형흔적을 없애기 위해 수직갱도 내부에서 폭파 시켰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된 유해 가운데 화염흔이 발견되고 있는 점이나 갱도 내부의 짙은 화흔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설명회에 앞서 이번 발굴을 진행한 박현수 책임연구원은 1부 인사말에서 “이번 발굴은 코발트광산에서 돌아가신 억울한 사람들은 물론 제3세계 민중들에게 역사를 부여해 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작업” 이라며 “이들의 과거 삶과 죽음이 문서 형태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서 이들에게 부여해줄 역사적인 단초를 찾고 있다”고 발굴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이들을 생매장하고 반세기가 지나도록 은폐한 것은 범죄행위”라며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좋은 미래를 열 수 없다”고 말했다.

 

인사말에 이어 이지녀(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의 진혼굿이 1시간 정도 펼쳐져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넋과 그 유족들을 위로했다.

 

2부 설명회에서 김동춘 진실위 상임위원은 “갈 길이 먼데 해가 지려하고 있다며 지역사회에서 더 많은 공감대를 얻어내 민간인학살 현장을 보존, 후세에게 교육장으로 물려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발굴현장 실무책임자인 윤병태 박사는 “이번 발굴의 한계는 우리 사회의 한계”라며 “유족들이 이 문제를 유족회의 문제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사회적 문제로 고민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설명회에는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 최현호 전 울산연합 의장, 함종호 4.9인혁재단 집행위원장, 여중철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장, 권헌익 영국 에딘버러대 교수, 정태경 화백 등 내빈과 경산 대구 영천 영덕 사천 예천 청도 칠곡 함안 의령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경산유족회 이태준 이사장은 “진실위의 2차에 걸친 발굴로 32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아직도 현장에는 유해들이 토석이 뒤범벅이 된 채 58년간 암흑에 방치돼 있다”며 “앞으로도 발굴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보존과 발굴된 유해안치, 위령탑 건립, 위령공원 조성 등에 진실위와 정부,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유족 등이 한마음으로 나서줄 것”을 호소했다.


한편 평산동 코발트광산 학살현장에서는 지금까지 총 450여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지난 20013월 유족회 차원의 1차 발굴에서 40, 2003420, 2005  80, 20079월 국가차원의 1차 발굴에서 120, 2008200(추정)가 발굴됐다.

 

)6차 발굴

“예산 부족, 현장 상황 등으로 유해 집중매장지 발굴 직전에 발굴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올해가 국가 차원의 마지막 발굴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제부터는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현장보존과 발굴을 위한 대책들을 촉구해 나가야 합니다.

 

2009929일 평산동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현장 2009 발굴 현장설명회에서 이번 발굴을 진행한 윤병태 박사가 유족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발굴단은 지난 3개월간 수평2굴에서 명확히 분류가 가능한 유해 42구와 분류되지 않은 유해 20여구 등 총 60여구의 유해와 단추, 가죽제품, 버클, 신발 등 유품을 발굴했다.

 

책임연구원인 박현수 교수는 “여기에 묻힌 사람들은 세계사의 무게에 눌린 사람들이라며 진상규명 발굴작업은 이러한 세계사와 싸우는 것이고,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는 전위 역할이며 우리 역사를 새로 쓰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라며 이번 발굴의 의의를 설명했다. 박 교수는 또 “평산동 코발트광산 발굴은 세계적으로 기록될만한 커다란 사업”이라며 “여기서 1차 매듭을 짓지만 영원히 묻자는 것은 아니고 다음번에는 좀더 체계적으로 과거를 밝혀내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장설명회에는 진실화해위 2009 유해발굴단 박선주 단장과 평산동 발굴단 박현수 교수, 경산시 김찬진 주민생활지원국장, 유족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한편 한국전쟁 시기 남한최대 민간인학살현장 가운데 한 곳인 평산동 코발트광산 유해발굴사업은 진실화해위가 20104월 활동을 종료함에 따라 미완의 발굴로 남게 됐다. 그동안 코발트광산 발굴은 2001, 2004, 2005년 등 3차례의 민간차원의 발굴과 2007-2009년까지 3차례 국가차원의 발굴 등 6차례에 걸쳐 전체 3500여구로 추정되는 유해 가운데 겨우 14%500여구의 유해의 발굴하는데 그쳤다. 위원회 활동이 종료됨에 따라 지난 4년간 위원회에 접수된 7800여건의 집단희생사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진실규명 결정도 받지 못할 전망이며 더구나 진실규명 신청조차 하지 못한 수십만 유족들의 희망도 사라지게 됐다.

 

이태준 경산유족회 이사장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은 최고 2년간 연장할 수 있는 한시법”이라며 “지금이라도 여야가 합의해 2년 더 연장해서 미처 신청하지 못한 유족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고, 마무리하지 못한 유해 수습과 기접수된 진실규명 결정에 진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평산동 유해발굴현황                   2012. 6 현재

일시

장소

개체수

보관장소

발굴기관

비고

1950.

7-9

코발트광산

3500명 추정

 

 

집단희생자

1960. 6

수직굴

미확인

미확인

유족회

 

 

2001.

3.9-11

수평2

40

현장

MBC/유족회

연세대

법의학팀

2003. 4.14

대원골

20

현장

유족회

유해확인차

2005. 8

대원골

A지점 21

B지점 10

현장

영남대

/유족회

인터불고

골프장 조성

2007. 7-9

수직1

수평1

수평2

미확인

40

120

충북대

진화위

경남대

이상길 교수

2008. 7-11

수평2

 

200

 

충북대

진화위

영남대

박현수 교수

2009. 7-10

수평2

60

충북대

진화위

영남대

박현수 교수

 

 

 

500

충북대 420

현장 80

 

 

 

 

 

 

 

 

 

6. 발굴 유해 처리문제 및 역사평화공원 조성

 

경산유족회는 코발트광산 역사기념관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애써 지운 세대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학살의 참상을 알려 다시는 인간사회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일제잔재 청산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무이다.

 

따라서 경산유족회는 진실화해위원회와 이후 행안부의 과거사지원 부서에 밝혔듯이 현재 발굴된 유해의 현장 내 안장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6차례의 발굴에서 총 5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된 현장은 전국에서도 유일하다.


평산동에서 발굴된 유해는 현재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역사평화공원 내 위령탑에 안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규모를 확대한다면 대구와 경북의 각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를 함께 모시는 광역단위의 위령탑도 수용할 수 있다. 각 지역별로 소규모 안장시설을 갖추면 좋겠지만 만 예산 상, 지역주민의 정서상 곤란한 점이 있다면 광역단위 안장시설도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을 지낸 김상숙(고려대) 교수는  “코발트광산을 역사평화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은 진실화해위 권고사항 이행하는 것”이라며 “평화도시이자 교육도시 경산시의 비전과 연계하여 이를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김 교수는 “평산동 코발트광산은 유해와 유품이 발굴되고 현장이 보존된 드문 경우”라며 “이전의 국가기관의 부당한 권력행사의 증거이자 우리 슬픈 역사의 단면인 학살현장을 잘 보전하여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며 이를 방치하는 것은 학살지 소재 지방자치단체의 수치이자 무능의 표시”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따라서 코발트광산은 대도시인 대구권과 대학도시 경산에 위치하며, 시민들의 주거지역과 근접성이 뛰어나 향후 평화 인권 민족화해를 위한 역사교육공간이자 시민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생활형 생태문화공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경산유족회는 코발트광산 역사평화공원이 조성되면 이곳에서 매년 대규모 반전평화인권 축제를 열어 식민수탈과 민간인학살의 아픔을 되새기고 나아가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억울하게 숨져간 민간인들의 원혼이 그제나마 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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