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뉴스/김진희기자) 199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20년 가까이 ‘양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신나게 야구를 했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2010년 9월 19일 30년 야구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은퇴를 결심하고 올스타 시즌 중 나의 둥지였던 삼성 라이온즈 구단과도 이야기를 마쳤다. 그런데 은퇴 전 광주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 출전선수 명단에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그라운드를 밟고 팬들과 작별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럴 기회조차 없이 쓸쓸히 은퇴를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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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전 프로야구 선수.(사진=동아DB)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힘든 마음을 이끌고 이른 아침 포항 구룡포항으로 홀로 낚시여행을 떠났다. 아침에 찾은 구룡포항은 활기가 넘쳤다. 선선한 바람과 하루를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이 얼어 있던 마음을 조금 녹게 했다. 바다 앞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낚싯대를 들고 물고기를 기다렸다. 천천히 출렁이는 바다와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사이에서 마음을 비우고 야구 인생 30년을 생각해봤다.
나는 정말 야구밖에 몰랐다.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13년 연속 올스타 선수에 선정되고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다시 생각해도 참 감사했다. 어렴풋이 앞으로 은퇴를 하고서도 이렇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또 마지막 경기도 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니 씁쓸한 마음도 함께 몰려왔다.
30년 야구 인생 은퇴 앞두고 떠난 낚시여행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걸려온 전화위복의 전화 한 통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하염없이 물고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 한 통이 왔다. SK 와이번스 구단 매니저의 전화였다. 이번 올스타전 대구 경기에 출전하기로 한 선수가 몸을 다쳐 출전할 수 없게 됐다며 대체 선수로 경기를 뛰어줄 수 있냐는 게 주 요지였다. 이런 기회가 생길 수 있었던 건 나를 야구의 길로 인도해준 은사이기도 한 김성근 감독의 추천 덕분이었다.
포항 구룡포항에서 그렇게 나는 전화위복의 순간을 맞이했다. 전화를 받고 나는 대구로 복귀해 마지막 올스타 경기에서 홈런을 치며 후련하게 경기를 끝내고, 다음 날 은퇴 발표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9월 19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SK와의 은퇴경기에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그동안 맡았던 1루와 우익수, 좌익수 포지션을 골고루 맡아 소화하고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팬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특히 은퇴경기에서 마련된 입장 수입 3000만 원은 전국 60여개 청소년 야구팀의 꿈나무들이 뛸 수 있는 청소년 야구대회를 개최하는 데 값지게 사용할 수 있었다. 또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아이들의 열정이 가득한 경기를 보고 느낀 감동이 계기가 되어, 이후 나는 감독·코치의 길이 아닌 멘토리 야구단 등 어려운 꿈나무들을 후원하는 길을 걷게 됐다. 나 자신이 야구로 꿈을 키우고 이뤘듯 야구로 아이들의 희망을 찾아주는 일이기에 후원 활동이 쉽지 않지만 보람도 크다.
누구나 위기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는 오히려 어떻게 잘해내려고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잠잠히 있기도 한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바닥을 치면 반드시 올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받아들이면 전화위복의 순간은 찾아온다.
지금도 힘들 때면 포항 구룡포항으로 떠난 짧은 여행이 생각난다.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기쁨과 환희의 기회가 찾아왔고, 반나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인생이란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여운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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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구룡포 앞바다. |
나는 아직도 구룡포항을 자주 찾는다. 물론 그 당시와 같은 감정을 또다시 느낄 수는 없지만 이제 새로운 구룡포항의 매력이 나를 즐겁게 한다. 싱싱한 대게나 과메기는 물론 낚시로 갓 잡은 생선으로 끓인 매운탕은 별미 중의 별미다.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 그리고 거친 파도와 시원한 바람은 물고기를 낚는 사람에게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가끔씩 일상을 떠나 만나는 자연과의 특별한 대화가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여행과 인생은 닮았다. 그리고 자연과 인사를 하다 보면 우리가 연연했던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도느낄 수 있다. 인생의 힘든 순간을 맞았을 때, 절망하기보다 가만히 자연으로 여행을 떠나 마음을 비우고 인생의 본질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내야구 인생을 깊게 생각할 수 있었던 포항 구룡포항의 여행처럼.
글· 양준혁 전 프로야구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