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한용렬기자) 예산문화원(김시운 원장)은 지난 22일 문화원 강당에서 제22회 전국청소년청하백일장 시상식을 개촤했다. 시상식에는 청하 성기조 선생을 비롯하여 황선봉 예산군수 그리고 서울에서 온 30명의 문인이 참여하여 행사의 품격을 더했다.
성기조 선생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요. 작가이며 학자다.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전국규모의 청하백일장은 그의 아호를 따서 만들었다. 지난 22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한국문학의 꿈나무를 발굴해왔다.
이번 백일장에는 전국에서 1,777명이 응모하여 62명이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김정하(여ㆍ예산고등학교 교사) 씨가 대학ㆍ일반부에서 특별상을, 전혜원(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시로 고등부에서 대상을 받았다.
행사장을 가득 메운 200여 명의 참석자는 62명의 입상자가 상을 받을 때마다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 특히 한국문단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 학생들이 상을 받을 때는 손뼉 치는 소리로 행사장이 소란스러웠다.
임완숙(여ㆍ청하문학회 중앙회) 회장은 “전국청소년청하백일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 행사로 손꼽히며, 푸른 청년의 기상으로 한국문단의 도약을 이끄는 희망의 횃불이 되고 있습니다”고 강조했다.
「어머님 전상서」라는 산문으로 국회의장상을 받은 김정하 교사는 “오늘 제가 받은 상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청소년청하백일장이 한국 문단을 선도해 나갈 수 있도록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고 소감을 말했다.
대상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은 전혜원 학생은 자신이 쓴 「장마의 끝에서」라는 시를 낭송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다양한 상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앞으로 책을 많이 읽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거라”며 부모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모로부터 칭찬을 받은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참고자료
국회의장상 수상작품
어머님 전상서
예산고등학교(교사) 김정하
어머니, 잘 지내시나요? 매년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이름, 바로 당신, 어머니입니다. 저도 어엿하게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고 살다보니 더욱 사무치는 이름이 바로 당신이군요.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심정을 헤아린다고 했던가요.....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애지중지 소중하게 잘 키워 주셨는지 이제야 깨달은 못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2012년 홀홀단신의 몸으로 혼자 병원에서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저는 아이를 낳은 기쁨보다는 어머니가 그리워서 목놓아 펑펑 울었더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친정어머니, 혹은 시어머니가 옆에서 몸조리도 도와주고, 옆에서 수발을 들어주며 산모의 회복을 돕고 있을 때, 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고 그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첫 손주를 안고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 상상만 해도 흐뭇했지만, 어머니는 이미 제 옆에 없었습니다. 자식을 낳은 기쁨도 잠시 어머니의 부재에 그저 서럽기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산후조리를 할 때도 어머니가 그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산모들처럼 곁에서 나를 보살펴주는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처음 낳아본 아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기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옆에 계셨더라면 지혜롭게 아이를 양육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을 텐데 말이죠.
저는 결혼을 한 이후에도 힘든 형편에 산후조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4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며 일을 나가야만 했습니다. 애 봐줄 사람이 없어 여기저기 애를 맡겨가면서 돈을 벌어야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더욱 어머니 생각이 간절합니다. 평소 아기들을 예뻐하고, 생전에“정하야, 나중에 니가 시집가서 애기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게.”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어머니 말씀이 귓가에서 맴돌곤 합니다.
늘 함께 하기에 소중함을 몰랐던 걸까요.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암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그저 응석받이 막내딸이겠죠. 하지만 제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키우던 시절에는 급식을 하지 않아서 매일 새벽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소풍가는 날이면 꼭두새벽에 일어나셔서 직접 김밥을 말아 예쁘게 담아주셨습니다. 그냥 용돈이나 쥐어주며 아무거나 사 먹으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학교생활 12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는 김밥이나 초밥을 정성스럽게 싸주셨죠. 어머니가 저를 키우던 시절에 우리 집에는 그 흔한 세탁기 한 대가 없어서 교복을 손수 빨아주시던 시절이었습니다. 여름은 그렇다고 쳐도, 겨울엔 찬물에 손 담궈가며 교복 세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손세탁을 물론이요 친구들 앞에서 주눅들지 말라며 항상 교복 셔츠를 새 것처럼 다려주셨습니다. 자가용이 없어서 버스로 통학하던 시절, 어머니께서는 행여 딸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걱정하시며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저를 기다려주시곤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시락 반찬이 맛없다고 투정부리는게 다반사였습니다. 교복 와이셔츠가 반듯하게 다려져 있지 않으면 괜히 엄마에게 짜증을 부렸습니다.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있는 엄마를 부끄러워하며 마중 나오지 말라고 소리도 쳤습니다.
어머니 제가 너무 못된 딸이었지요? 제가 자식을 키워보니 그건 부모로서의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도 사람이고 삶이 피곤하셨을 텐데 그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자식 뒷바라지를 한 것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겠죠. 저도 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지만 어머니처럼 자식을 기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오늘이 어머니 돌아가신 지 꼭 7년째 되는 날입니다. 아직도 친정어머니와 함께 쇼핑을 하거나 사우나를 함께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 당신이 그립습니다. 손주들 재롱에 웃음 지으시고 손주들 용돈도 쥐어주시는 주변의 할머니들을 보면 어머니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저는 생전에 어머니에게 어떤 딸이었나요?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친구 같은 딸이긴 했던가요?
엄마 없는 설움이 어떤 건지 제 나이 사십 줄에 접어드니 알 것 같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올 리 없겠지만, 꼭 한번만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를 이제는 제 품에 고이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키워주시느라 수고했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진심을 담아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 제가 받은 사랑을 어머니에게 다시 돌려드릴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저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내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은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그 무한한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이 지금은 제가 살아가는 큰 힘이 되니까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뭘 가장 좋아하실까요? 제가 삶이 힘들어 지칠 때도 늘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으며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갈게요. 하나 밖에 없는 피붙이 형제인 언니와도 자주 왕래하며 우애있게 지내도록 할게요.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가장 예뻐하실 손주들 잘 키우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게요.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매해 돌아오는 5월, 어머니의 기일이면 그 사랑의 무게만큼이나 책임감이 더해집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 것이고, 그래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은 맘뿐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생전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이제는 매 해 되뇌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로 살아주셔서, 그리고 저를 어머니의 딸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장마의 끝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예반 전혜원
기나긴 장마의 끝 쏟아지던 비의 끝자락에서
나무는 숨을 죽였다
거센 바람이 앙상한 가지를 흔든다고
찬 빗방울이 초라한 잎을 떨친다고
장마가 저를 갈기갈기 찢어낸다고
그렇게 믿었다
장마는 이미 지난지도 모른 채
여름조차 이미 지나버린 지도 모른 채
그리 숨을 죽였다
제 몸을 물어뜯은 그 괴물은
아직도 여기 있었다
상처는 나아 흉터가 되었지만
그가 앗아간 싱그러운 이파리들은
영영 단풍을 피워내지 못했다
그 것이 나무가 단단한 껍질로 저를 감싸 매어
힘겹게 돋아나던 남은 어린잎이 견디지 못한 까닭임을
나무는 알지 못했다
눅진한 장마가 끝나고 여름도 지난 가을
나무는 색색의 단풍 틈
저 홀로 폭풍우 속에서 쓸쓸히 울었다
그 여름을 지우지 못한 채
저 홀로 그 장마 속에 살았다
아직도 폭풍이 저를 쫓는듯해서
가만히 옹송그린 나무는
고사목마냥 숨조차 쉬지 않았다
해서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 여름의 기억에 갇힌 나무는
해사한 가을 햇살에서 작열하는 여름 해를
들큼한 가을 단비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서늘한 가을 바람에서 몰아치는 폭풍우를
보았다
유난히 혹독했던 여름을 홀로 난 나무는
차곡차곡 쌓여 썩어가는 외로움을
차마 버리지도 못 한 채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를
저도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무는 가을을 잃어버렸다
실버넷뉴스 김종화 기자 jonghwa50@silver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