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김국현기자)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바친 독립유공자들의 후손 25명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합니다.
법무부(장관 박상기)는 2017. 8. 11.(금) 11:00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그동안 외국국적으로 살아오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 유공자 후손 25명을 대상으로 국적증서 수여식을 개최합니다.
독립유공자 공적개요 및 참석자 명단
독립유공자 | 귀화 대상 후손 | ||||
성 명 | 훈 격 (수여연도) | 공적 개요 | 국 적 | 성 명 | 관 계 |
김규면 (1880 ~ 1969) | 독립장 (‘02) | ○ 1919년부터 대한신민단 단장으로 활동하였고, 동년 11월 중순에는 이용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 독립단을 조직하여 1920년 4월까지 무장독립운동을 전개 ○ 1920년 10월 러시아 니꼴스크, 우수리스크지방으로 들어가 무력투쟁을 준비하고, 동월 동만에 있는 대한의민회, 대한국민회, 대한광복단을 병합하여 총판부를 조직 ○ 1921년 정재관과 러시아 니꼴스크, 우수리스크지방에서 창해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 1924. 5월에는 임시정부 교통차장 및 교통총장 대리에 선임되었고, 1924년 상해에서 청년동맹회의 간부로 활동 ○ 이후 모스크바, 끄르임 등지에서 생활하다 1969년 사망 | 러시아 | 박 콘스탄틴 (27세, 남) | 현손 |
박 안나 (22세, 여) | 현손 | ||||
김만겸 (1886 ~ 1938) | 애국장 (‘05) | ○ 1910년 성명회의 회원, 1911년 블라디보스톡 한족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7년 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대회 참석 및 『청구신보 』편집인으로 활동 ○ 3․1운동 직후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 번역․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 동년 11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최재형 등과 독립단을 조직, 1920년 대한국민의회 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하다 4월 참변 후 5월 중국 상해로 이동해 이동휘와 고려 공산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 ○ 1929년 소련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옥사 | 러시아 | 맹 안드레이 (55세, 남) | 증손 |
맹 게르만 (53세, 남) | 증손 | ||||
쿠르바소바 나탈리아 (30세, 여) | 현손 | ||||
맹 디아나 (6세, 여) | 현손 | ||||
쿠르바소바 베로니카 (3세, 여) | 내손 | ||||
이인섭 (1888~ 1982) | 애국장 (‘06) | ○ 1907년 2월부터 1911년 10월까지 평남 맹산군 일대에서 김관수의 진에 참가하여 의병부대장의 서기로 활동 ○ 1910년 7월 홍남구와 함께 만주지역 일대에서 국민회지방회 설립 ○ 1913년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으며, 191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동휘․김립과 함께 권업신문을 발간하고 한인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 ○ 1919년 12월 한․중․몽․일 혁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부터 1923년 12월까지 이만 한인유격대 정치위원으로 활동 | 러시아 | 슬로보드치코바 스베틀라나 (69세, 여) | 자 |
슬로보드치코브 안드레이 (42세, 남) | 손 | ||||
슬로보드치코브 세르게이 (36세, 남) | 손 | ||||
강상진 (1902 ~ 1938) | 애족장 (‘95) | ○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 장백현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비단에 참가하여 활동 ○ 1921년 군비단이 러시아로 이동할 때 부대 책임자로 대원을 인솔하고 이만으로 이동하였고, 동년 7월 군비단이 고려혁명의용군대로 개편된 후 고려혁명군사의회 헌병대장으로 대일 항전 ○ 1923년 이후 교원, 인쇄공 및 농업에 종사하다가 1973년 사망 | 러시아 | 강 스베틀라나 (50세, 여) | 손 |
강 블라디미르 (48세, 남) | 손 | ||||
남자현 (1872 ~ 1933) | 대통령장 (‘62) | ○ 경북 영양 사람으로 1895년 부군 ‘김영주’가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를 봉양 ○ 1919년 3·1운동 참가 후 만주로 망명하여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약하는 한편, 동만 일대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함 ○ 1925년 서울에서 일제총독 ‘재등실’ 암살을 계획하다 미수에 그치자 만주로 돌아가 양기탁 등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 ○ 1928년에는 길림성에서 김동삼․안창호외 47인이 중국경찰에 잡히게 되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지 및 석방에 노력 ○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왼손 두 마디를 잘라 흰수건에 ‘韓國獨立願’(한국독립원)이란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 ○ 1933년 만주국 최고의 권력자로 만주국 일본전권대사인 무등신의를 제거하기 위해 만주 건국일인 3월 1일을 기다려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 하얼빈 교외 정양가에서 일본경찰에 체포 ○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6개월간 고초를 당하다가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여 하얼빈 남강 외국인묘에 안장됨 | 중 국 | 김림위 (27세, 남) | 현손 |
박찬익 (1884 ~ 1949) | 독립장 (‘63) | ○ 1904년 관립 상공학교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하여 수차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퇴학, 1907년 초에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활동 ○ 1910년 한일합방되자 북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투신하여 교육사업에 주력 ○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과 자립사상 고취하고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 ○ 1921년 7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대리로 외교를 실질적으로 전담 ○ 1932년 일정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 등을 저격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는 등 일제 앞잡이를 처단하는데 부단히 활동 ○ 1940년 중경 임시정부에서 법무부장,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8․15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駐華)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기여 | 중 국 | 신영조 (57세, 남) | 증손 |
신영호 (52세, 남) | 증손 | ||||
신영구 (48세, 남) | 증손 | ||||
김남극 (1868 ~ 1920) | 애국장 (‘91) | ○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수령으로 독립군 통제 ○ 1920년 10월 일군에게 붙잡혀 대황구에서 사살당해 순국 | 중 국 | 김문려 (31세, 여) | 현손 |
이응선 (1905 ~ 1971) | 애국장 (‘10) | ○ 1920년 평북 철산에서 천마산대에 입대하여 활동 ○ 천마산대는 3․1운동 직후에 조직된 무장투쟁 단체로 군자금모금, 일제 식민 통치기관 파괴, 일본군경 및 친일분자의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 ○ 1922년 만주에서 통의부에서 활동하다 참의부 성립후 참의부 참사로 항일무장투쟁 전개 ○ 1928년 10월 통화현 영사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총포화약취체규칙 위반 등으로 징역 7년을 받음 | 중 국 | 이태선 (29세, 여) | 손 |
장현우 (3세, 남) | 증손 | ||||
김종경 (1904 ~ 1965) | 애국장 (‘96) | ○ 1931년 평북 용천군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 ○ 1931년 재만 독립군단체 국민부원으로 국내 잠입한 정봉화와 연결되어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기로 하고 권총 및 탄환 288발을 평북 용천군 거주 부호 차동봉에게 내밀며 군자금 5,000원을 수령 ○ 이어 추가로 약속한 군자금을 건네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차동봉의 신고로 출동한 일경과 격투를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결국 체포됨 ○ 1932년 12월 강도 및 살인미수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름 | 중 국 | 김경일 (39세, 남) | 증손 |
구자익 (1998 ~ 1945) | 대통령 표창 (‘08) | ○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숙부를 따라서 간도로 이주하였고, 1906년 중국 길림성 용정촌 서전서숙에서 수학 ○ 1919년 중국 왕청현 백초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연설 ○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 군무과장으로 활동 | 중 국 | 구송빈 (62세, 남) | 손 |
구걸 (35세, 남) | 증손 | ||||
현금란 (56세, 여) | 증손 | ||||
미 국 | 현무 (47세, 남) | 증손 | |||
이승준 (1882 ~ 1947) | 대통령 표창 (‘11) | ○ 1924년경부터 1934년까지 쿠바에서 대한인국민회 마딴사스 지방회 구제원으로 활동 ○ 1928년에는 한인동포 국어교육운동을 전개 ○ 1930년 광주학생운동을 원조 ○ 1931년경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립금 약 44원 58전을 지원 | 쿠 바 | 엘리자베스 주닐다 (26세, 여) | 현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