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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개천절이 국경일 된 까닭은

이건봉 현정회 사무총장

‘처음으로 국가를 세운 날’이란 뜻의 ‘건국일’입니다. 우리나라는 건국기념일 대신 10월 3일 개천절을 챙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국가의 생일을 개천절이라 부르는 걸까요? 개천절은 언제, 어떻게 국경일로 지정됐을까요? 답은 나라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던 시대, 일제강점기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개천절.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지, 소중이 알아봤습니다.
단군성전. 1962년 서울 종로구 사직단 내에 지어졌다. 매년 10월 3일 현정회가 개천절 대제를 올리는 곳이다.
단군성전. 1962년 서울 종로구 사직단 내에 지어졌다. 매년 10월 3일 현정회가 개천절 대제를 올리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349년 전 10월 3일, 하늘 신의 아들인 환웅이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옵니다. 비·바람·구름의 신과 함께 온 환웅은 지금의 백두산으로 추정되는 ‘태백산’ 자락에 신의 도시를 만들어요. 그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토대로 세상을 다스렸죠. 124년 뒤 환웅은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습니다. 단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세우고 1500년간 나라를 유지했습니다. 단군 신화라 불리는 이 이야기에는 우리나라의 탄생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어요.
단군 정신을 널리 알린 독립운동가 나철.
                             
우리 조상들은 단군에서 시작된 이 역사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늘 신의 자손인 단군으로부터 이어져온,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한민족라고 여겼죠. 단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천행사를 열어 감사함을 전했어요. 하늘이 열렸다고 여긴 음력 10월 즈음이면 수확한 곡식을 하늘·땅·바람·비의 신에게 바치고 절을 올렸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신라와 고려의 팔관회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 중기 이후 몽골의 침략이 오래 이어지고 다양한 외래문물이 들어오며 제천행사는 그 의미가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각 집안의 조상을 기리는 제사로 축소되거나 행사 자체가 사라지며 한민족 정신이 잊혀져 갔던 거예요.

단군 이야기가 부활한 건 1909년입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바탕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우리나라를 탄압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한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힘이 필요했던 거죠. 독립운동가 나철은 그 답을 ‘단군’에서 찾았습니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운 만큼 흩어진 민족의 마음을 모으는 중심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는 하늘의 문이 열렸다고 하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명하고, 경축일로 지정했어요. 그날에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사당에서 기념행사와 제천행사를 진행했죠.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치른 개천절 행사는 우리 민족을 똘똘 뭉치게 하는 기틀이 됐습니다.

이후 개천절은 1919년 공식 국경일로 지정됩니다. 그 해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했어요. 임시정부는 점차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민족의 단결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개천절을 의미하는 건국기원절(음력 10월 3일)을 비롯해 독립선언일(3월 1일), 헌법발포일(4월 11일) 등을 국경일로 만들어 그 뜻을 되새겼어요. 또 신문과 벽보 등을 이용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이 소식을 알렸어요. 건국기원절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예부터 사용해온 개천절로 명칭을 바꿔 쉽게 기억하게 했죠. 덕분에 많은 동포들이 그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긍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개천절 기념행사는 음력 10월 3일, 임시정부와 민간기관을 중심으로 국내외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했던 만큼 주로 밀실에서 진행됐죠. 임시정부가 연 행사는 독립운동가 신규식 등이 중심이 됐습니다. 그들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초대해 경축행사를 연 뒤 단군에게 제를 지내는 제천행사를 진행했어요. 한자리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개천절을 기념하며 각자의 활동 상황을 전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졌죠.
1921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일제는 개천절 행사를 경계했습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말처럼 조선인들이 모이면 애국심이 더 강해지게 되고, 결국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세력이 커질 거라 생각했던 거예요. 특히 일제 탄압이 심했던 국내에서의 개천절 행사는 늘 비밀리에 이뤄졌습니다. 3·1운동의 본거지인 충남 천안과 충북 괴산, 전남 곡성 등 각 지역의 깊은 산속에 사당을 만들어 행사를 진행했죠. 일제는 무력 외에 민족말살통치를 통해서도 개천절 행사를 억압했습니다. 민족정신을 없애 단결력을 깨트리겠다는 목적이었어요. 그중 하나가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 설립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일제의 통치목적에 맞게 다시 쓰기 위해 설치한 한국사 연구기관으로, 단군의 역사도 축소·왜곡시켰죠.
오늘날 국회를 뜻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1921년 1월 1일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1919년 항일운동단체 청년맹호단이 간도지역 동포에게 보낸 경고문. 개천절 맞이 ‘태극기 게양’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우리의 민족정신은 쉽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일제 탄압이 그나마 덜했던 국외와 민간단체의 활발한 활동이 큰 역할을 했어요. 주로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됐는데, 산속 등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개천절 행사를 열었죠. 특히 일제의 통치력이 약했던 미국에서는 매해 기념식을 진행했고요. 덕분에 개천절은 굳건히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개천절을 중심으로 단합된 민족정신은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됐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 1949년부터 개천절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양력 10월 3일로 고정됐습니다. 국민이 더 쉽게 기억하고, 그날을 기리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 뒤로 매년 10월 3일마다 개천절을 기념하는 경축행사와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개천절 기념 경축식을 진행한 뒤 각 지역의 단군 사당과 제단에서 제사가 진행되죠. 서울의 경우 1962년까지는 남산의 제천단에서, 그 이후에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서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동하여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개천절은 국가가 세워진 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근본 정신으로 역할을 했던 거예요.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민족에게 개천절은 한민족이라는 공통체 의식을 갖게 한 상징이었다”며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볼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깨닫듯 개천절을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의지를 되새겨보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개천절에 숨겨진 이야기를 안 만큼 이번 개천절은 조금 특별하게 지내보면 어떨까요.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떠올리기 위한 묵념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태극기 가슴에 품었을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1883년 태극기 원형본이 선포됐지만 국기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형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국가를 향한 마음만큼은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태극기 원형본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했던 태극기를 소개합니다. 10월 3일 아침, 집에서 태극기를 달며 늘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독립운동에 임했던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태극기 원형본(1882년 추정)
2008년 영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1883년 1월 같은 모양의 국기가 우리나라 국기로 공식 선포됐다.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제작법 확정 이후부터 일정한 형태를 유지했다.
독립운동가 남상락의 자수 태극기(1919년)
독립운동가 남상락이 1919년 충남 당진 4·4만세 운동에서 사용했다. 그의 부인이 손바느질로 만들었는데, 가로 44㎝, 세로 34㎝의 흰 명주 천에 홍·청·검정 실로 수를 놓아 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1923년)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걸렸던 태극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봉준과 그의 아내 노영재가 함께 만들었다. 가로 189㎝, 세로 142㎝ 크기에, 태극과 4괘는 천을 오려 꿰맸다.
김구 친필서명 태극기(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가 벨기에 출신의 신부 매우사에게 전달한 것이다. 태극기 바탕 한쪽에는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당부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1945년)
광복군인 문웅명이 1945년 동료 대원 이정수에게 받은 태극기다. 1년 뒤 문웅명은 부대를 옮기게 됐는데 이를 아쉬워한 동료들이 이 태극기 여백에 서명을 했다. 광복을 향한 의지가 담겨 있다.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ang.co.kr, 사진=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중앙포토, 도움말=김영장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연구원,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이건봉 현정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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