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1승보다 값진 개혁

2017.09.20 12:23:45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지금 우리 축구팬들은, 아니 우리 국민은 정신적 외상의 날들을 보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비록 ‘동네축구’ 소리를 들었지만 풋풋했던 ‘희망의 축구’ 시절이 있었다. 직접 축구공을 차고   또 경기를 지켜보며 우리는 함께 꿈을 꾸었고 애환을 나눴다. 시련과 도전의 시기에도 축구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위안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축구로 말미암아 분노한다. 개혁의 사각지대와도 같은 축구계의 무능하고 부패한 현실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 전·현직 임직원들이 업무상 배임 혐의로 형사 입건됐다. 업무추진비 등의 명목으로 지급된 법인카드를 멋대로 썼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협회는 지난 15일 사과문을 통해 과거 5∼6년 전에 부적절한 관행과 내부 관리 시스템 미비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고 밝혔다. 협회의 이 같은 ‘관행 아닌 관행’, 관리 시스템의 미작동 내지 오작동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인데 협회는 정작 그런 걸 몰랐단 말인가. 오죽하면 ‘축피아’라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국민이 협회의 비리 뿐 아니라 그 같은 형식적 사과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부끄러움을 알고 반성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경기인 출신이든 아니든 ‘돈’이 아니라 ‘축구’ 그 자체가 좋아서 관련 협회 일을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고 쌈짓돈 쓰고 갑질 하는 맛에 축구계 주변을 맴도는 것이라면 정말 스포츠 정신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스포츠는 평화를 위해서도 혹은 전쟁을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스포츠를 나쁜 방향으로 이용하려고 작정하면 그 피해는 예측할 수 없다.

 

지금도 축구계 어딘가에선 더러운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돈이 없으면 운동도 못한다는 말이 정설이 됐다. 하지만 협회는 그들만의 기득권 성채를 쌓은 채 제 잇속 챙기기에만 골몰하는 양상이다. ‘동심의 축구’를 즐기는 유소년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아마축구가 있어야 프로축구도 있다. 선수가 되겠다는 학생이 줄고 있는 현실을 협회는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제2의 박지성’을 꿈꾸는 어린 학생들이 도금이 벗겨진 메달을 간직한 채 꿈을 잃어가고 있다. 꿈나무들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세상은 끔찍하다.

 

국가대표팀의 경기력 저하 또한 협회의 무능한 행정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중국 고전 ‘순자’에 봉생마중 불부이직(蓬生麻中 不扶而直)이라는 말이 있다. 쑥이 삼밭 가운데에서 자라면 붙들어주지 않아도 삼처럼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우리 속담에도 ‘삼밭의 쑥대’라는 말이 있다. 지금 축구계 현실은 어떤가. 될성부른 나무가 땅을 잘못 만나 이내 말라죽어버리고 마는 꼴이라고나 할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새다. 어느 축구인의 말마따나 협회가 “불량품을 만드는 공장”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는 “국민들에게는 국제축구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도시 하나를 점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대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축구를 이용하고 조종했던 히틀러 같은 독재자 시대의 감각이다. 월드컵에 나가서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민이 지금 갈구하는 것이 오로지 승리를 챙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협회’로 상징되는 무능과 부패의 폐쇄적인 축구 토양을 근본부터 바꾸라는 것이다. 월드컵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지난 5일 오후(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정우영과 김영권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5일 오후(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기. 신태용 감독이 정우영과 김영권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근 불거진 히딩크 감독설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히딩크는 학연과 지연을 배제한 선수 기용과 나이와 위계를 따지지 않는 수평적 리더십으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월드컵 변방에 머물던 한국을 2002년 4위로 끌어올린 것은 8할이 그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한국대표팀 사령탑에 관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한국 축구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히딩크 영입에 이해관계가 얽힌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협회는 심드렁한 것을 넘어 적대적인 분위기다. 아시아 축구강국으로서 언제까지 외국 감독에 기댈 것이냐 하는 그야말로 순수한 국가적 자존심 차원에서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겠다. 

 

히딩크의 한국대표팀 감독행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감독을 바꿔 평가전 몇 번 치르고 대회에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주장한다. 지도자에 대한 선수들의 눈높이도 높아져 히딩크 리더십이 통할지 의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본선 진출을 일궈낸 신태용 감독의 공로와는 별개로 많은 국민은 그의 지도 역량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앞선 국제대회에서 그가 보여준 미숙한 경기 운영과 실패한 경기에 대한 성찰 부족은 두고두고 지적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부패한 집단에 더는 한국 축구를 맡길 수 없다는 게 여론이다. 잿밥에 관심 있는 협회에 정치적으로 휘둘릴 가능성이 상존하는 한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음은 지난 월드컵 감독들의 초라한 성적표가 말해준다. 본선을 앞둔 시점에 국민의 공분을 사는 축구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자는 것은 함께 넘어져 같이 망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수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듯이 국민 또한 1970년대 ‘박스컵’ 시절의 국민이 아니다. 밤새도록 전 세계의 수준 높은 경기를 보며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축구애호가들이 수두룩하다. 히딩크의 지도력에 다시 한 번 기대를 거는 것을 무지의 소치라고 일거에 내칠 일은 아니다. 협회가 제 식구나 챙기는 무기력한 ‘이익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각인돼 있는 한 ‘히딩크 대망론’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히딩크 영입을 촉구하는 흐름은 청와대 신문고에 청원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히딩크가 월드컵 성공신화를 다시 써줄 메시아라도 돼서 그러는 게 아니다. 국민의 요구는 단순히 월드컵에서의 1승이 아니라 오랜 타성에 찌든 한국 축구계의 적폐를 하루 속히 청산해 달라는 것이다.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축구계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월드컵 성과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축구의 미래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축구계의 일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청준 소설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소릿재 주막의 주모는 소리하는 딸에게 한을 심어줘 소리를 비상하게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었다고 말한다. 득음을 위해 아비가 자식의 눈을 빼앗는, 그야말로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다. 그런 불퇴전의 각오로 개혁에 임해야만 수렁에 빠진 한국 축구는 살아날 수 있다. 그래야 보기에도 민망한 텅 빈 축구 관중석도 채워지고, 돌부처처럼 돌아앉은 국민의 마음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협회와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다. 협회는 패거리 의식에 갇혀 ‘타자(他者)’를 지우고 밀어내는 구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섣부른 타협도 성마른 폄훼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부끄러워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무능과 부패의 대명사가 된 협회, 소진되어가는 우리 축구의 미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축구인은 물론 모든 스포츠 종사자, 그리고 언론도 국민의 신뢰를 잃은 축구계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 축구는 여전히 우리의 꿈과 희망이어야 한다.

 

김종면

◆ 김종면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서울신문에서 문화부장 등을 거쳐 수석논설위원을 했다. 지금은 국민권익위원회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서울여자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로 세계 문학과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김한규 기자 khk21art@ikb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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