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 이야기가 부활한 건 1909년입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바탕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우리나라를 탄압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한민족을 분열시키려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힘이 필요했던 거죠. 독립운동가 나철은 그 답을 ‘단군’에서 찾았습니다. 단군이 처음 나라를 세운 만큼 흩어진 민족의 마음을 모으는 중심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그는 하늘의 문이 열렸다고 하는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명하고, 경축일로 지정했어요. 그날에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인 사당에서 기념행사와 제천행사를 진행했죠.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치른 개천절 행사는 우리 민족을 똘똘 뭉치게 하는 기틀이 됐습니다.
이후 개천절은 1919년 공식 국경일로 지정됩니다. 그 해 4월 13일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했어요. 임시정부는 점차 거세지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민족의 단결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개천절을 의미하는 건국기원절(음력 10월 3일)을 비롯해 독립선언일(3월 1일), 헌법발포일(4월 11일) 등을 국경일로 만들어 그 뜻을 되새겼어요. 또 신문과 벽보 등을 이용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이 소식을 알렸어요. 건국기원절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예부터 사용해온 개천절로 명칭을 바꿔 쉽게 기억하게 했죠. 덕분에 많은 동포들이 그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긍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민족정신은 쉽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일제 탄압이 그나마 덜했던 국외와 민간단체의 활발한 활동이 큰 역할을 했어요. 주로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됐는데, 산속 등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개천절 행사를 열었죠. 특히 일제의 통치력이 약했던 미국에서는 매해 기념식을 진행했고요. 덕분에 개천절은 굳건히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개천절을 중심으로 단합된 민족정신은 독립운동의 밑바탕이 됐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 1949년부터 개천절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양력 10월 3일로 고정됐습니다. 국민이 더 쉽게 기억하고, 그날을 기리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 뒤로 매년 10월 3일마다 개천절을 기념하는 경축행사와 제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개천절 기념 경축식을 진행한 뒤 각 지역의 단군 사당과 제단에서 제사가 진행되죠. 서울의 경우 1962년까지는 남산의 제천단에서, 그 이후에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단군성전에서 정부와 민간단체가 합동하여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개천절은 국가가 세워진 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이끈 근본 정신으로 역할을 했던 거예요.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민족에게 개천절은 한민족이라는 공통체 의식을 갖게 한 상징이었다”며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볼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임을 깨닫듯 개천절을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의지를 되새겨보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개천절에 숨겨진 이야기를 안 만큼 이번 개천절은 조금 특별하게 지내보면 어떨까요.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떠올리기 위한 묵념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태극기 가슴에 품었을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1883년 태극기 원형본이 선포됐지만 국기 제작에 대한 구체적인 형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국가를 향한 마음만큼은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태극기 원형본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했던 태극기를 소개합니다. 10월 3일 아침, 집에서 태극기를 달며 늘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독립운동에 임했던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글=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ang.co.kr, 사진=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중앙포토, 도움말=김영장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연구원,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이건봉 현정회 사무총장